박 대통령은 “남 의원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하고 하문. 김영삼씨의 의원직 제명에 관해서는 나와 가까웠던 미대사관의 리처드슨 서기관이 국회까지 달려와 구내식당에서 “만약에 제명하면 심각한 파급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심각한 얼굴로 거듭거듭 경고했었다. 나는 선별수리를 합창하는 의원들 속에서 뒷머리만 긁었다. 남재희 언론인숨기던 사위 이름이 나오자 언성 높여 청와대에서 있었던 몇몇 논설위원과의 술자리에서 <조선일보>에 있던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솔직히 말해보라고 하여 내가 국회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집안 다섯 명(김종필, 육인수, 김종락, 장덕진, 한병기)을 거론하며 각계에 분산시키지 않고 국회에 집중한 데 대해서 말하자 박 대통령은 “내 사위(한병기) 말이냐, 속초에서 그 애 아니면 국회의원감이 마땅치 않다던데” 하고 언성을 높였다. 나는 “대통령 사위니까 그렇죠”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어이쿠 잘못 건드렸다고 함구. 박 대통령은 6·25 때 충북 옥천의 지주 집안 육영수 여사를 만나 전처와 이혼하고 재혼을 한 것인데 대통령이 되고 난 다음에는 육 여사 이전의 일은 깡그리 지워버렸다. 그 후 내 말을 유념한 듯 국회에서 박 대통령 집안은 점차 2명으로 줄었는데 한병기씨는 외국대사로 내보내졌다.경제개발 지상이냐, 경제개발·민주 병행이냐<문화방송>(MBC) 티브이(TV)에서 유신이 있기에 앞서 ‘경제개발과 민주화’에 관한 한 시간쯤의 대토론회가 있었다. ㅇ논설위원은 우리의 경제발전 단계가 아직 멀었다며 경제발전을 역설하고, 경제발전이 되면 민주화는 자연히 뒤따르게 된다고 매우 능변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나는 경제발전도 중요하지만 민주발전도 중요하다고 민주발전의 싹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며 경제와 민주의 병행발전을 역설했다. 그러다 보니 그 논쟁은 매우 치열하게 전개된 모양이다. 얼마 후 박 대통령과 언론계의 만남에서 박 대통령은 ㅇ논설위원과 나를 바라보며 “오늘 보니 둘이 매우 친한 모양인데 티브이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심하게 다투었소” 한다. ㅇ위원에게는 다정하게, 나에게는 서먹하게 대했다는 느낌. 이 이야기는 그때 박 대통령이 구상했을 것인 유신과 연관된 것으로 뒤늦게 생각이 떠올랐다. 경제발전이 되면 그 후 민주발전은 자연히 된다는 이야기는 유신을 합리화하는 논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때의 박 대통령은 역사의 분기점에 서 있었다. 유신을 단행하느냐, 3선으로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후임에게 대통령직을 넘기느냐의 갈림길이었다. 그때 유신을 하지 않고 대통령선거를 정상적으로 치렀더라면 김종필씨에게 승산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경제발전과 민주발전의 병행 가능성이다.전원 반려냐, 선별 수리냐 유신 7주년 기념행사가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렸을 때다. 당시 김영삼 야당 대표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한 데 항거하여 야당 의원 전원이 사표를 제출했다. 청와대 핵심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인지 차지철 경호실장의 생각인지(이쪽 같다) 모르지만 그중 일부는 수리하고 일부는 반려하자는 이른바 선별수리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을 때다. 1층 칵테일파티장에 서너 개의 테이블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가까웠던 김재명 교통부 장관이 “동생, 시시한 것들과 어울리지 말고 나하고 술이나 하세” 하고 이끄는 데 따라 구석에 있던 간이바로 가서 박 대통령과 육사 동기인 그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박 대통령이 입장하자 첫째 테이블 쪽에서 선별수리론이 요란하다. 마치 합창 같다. 주로 유정회 의원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그리고 박 대통령이 둘째 테이블로 왔다. 오자마자 나를 부른다. 박 대통령은 “남 의원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하고 하문. 김영삼씨의 의원직 제명에 관해서는 나와 가까웠던 미대사관의 리처드슨 서기관이 국회까지 달려와 구내식당에서 “만약에 제명하면 심각한 파급영향(serious repercussion)이 있을 것”이라고 심각한 얼굴로 거듭거듭 경고했었다. 나는 선별수리를 합창하는 의원들 속에서 불가하다고 일괄반려를 주장하는 것이 매우 어색하다고 느껴 계속 함구하며 뒷머리만 긁었다. 박 대통령은 나를 응시하고 주변에서는 답변을 재촉하고… 실제로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긴 시간인 1, 2분쯤 지난 후 박 대통령은 몸을 아주 절도있게 휙 돌려 2층 만찬장으로 향했다. 그다음날 여권 의원 전원의 개별의견을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청와대 지시가 떨어졌다. 공화당 의원들은 압도적으로 일괄반환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 문제가 결론이 나기도 전에 궁정동의 총소리가 울렸다.김재규 부장과 홀브룩의 신문기고문 궁정동 안가의 역사를 바꾼 총소리가 울리기 몇 달쯤 전일까, 일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중의원 의원이 방한하였는데, 그는 차기 총리가 확실시되는 인물이기에 2일간의 체류 중 하루는 공화당의 초선의원인 내가, 다음날은 유정회의 초선인 김윤환 의원이 동승해 안내를 담당하였다. 제3땅굴을 시찰하고 국무총리를 예방한 후 남산의 집무실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예방하는 순서다. 김 부장 예방에는 윤일균 해외담당 제2차장이 배석하여 30분 넘게 진행된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도 내 기억에는 김 부장이 약간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었던 듯한 인상이다. 가령 나카소네가 ‘세이도쿠’(西獨), ‘도도쿠’(東獨)라고 독일의 예를 설명할 때 그는 무슨 이야기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옆에 있던 윤 차장이 “서독과 동독의 이야기입니다”라고 설명을 해줄 정도였다. 일본어를 충분히 교육받은 연령대인데 분명 딴생각을 하느라 정신이 집중되지 않은 듯했다.그리고 얼마 있어 나는 <뉴욕 타임스> 선데이 매거진의 시일이 오래 지난 호를 읽었는데 거기에 리처드 홀브룩의 기고문이 실리고, 그는 그 글에서 미국의 유명한 정치학자의 글을 인용하면서 그 학자는 한국의 막힌 상황은 결국 박정희 대통령을 축출하여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자기도 같은 생각이라고 하였다. 그때 홀브룩은 카터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돕고 있었는데 카터가 당선된 후 그가 국무부의 동북아담당 차관보로 임명되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듯하다. 만약 예상했다면 그런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김재규 부장은 나카소네와의 면담 때는 이미 틀림없이 홀브룩의 기고문을 보고받은 후였을 것이다. 그리고….박 대통령의 비극이 일어나고 얼마간 지난 후다. 정동의 미대사관저에서 홀브룩 차관보를 위한 큰 환영파티가 열렸다. 취임 후 상당히 시일이 지났을 때인데 그는 한국을 방문 안 했거나 왔어도 은밀히 왔다 간 것 같다. 키가 매우 큰 그를 마주치자 나는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이 제거되고 나니 기분이 어떠냐”고 질문을 던졌다. 그랬더니 미국 관리들이 나를 둘러싼다. “무슨 이야기냐”는 것이다. 문제의 <뉴욕 타임스> 기고문을 말하니 구체적 내용을 꼬치꼬치 묻는다. 내 등 뒤에서 “놀랐다”(surprised)라는 말이 들리기도 하고. 그러는 사이에 홀브룩은 아무 말 없이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없었다.그 후 몇 년 지나 김용식 전 외무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한-미 수교 백주년 축하 사절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여러 도시를 돌 때였다. 뉴욕에서의 파티는 성대하였다. 2차대전 때 중국에서 활약한 ‘플라잉 타이거스’(나는 호랑이) 비행단을 만든 셔놀트(Chennault) 장군의 중국계 부인도 참석하여 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는데 참 공교롭게도 그때는 현역에서 잠시 떠난 홀브룩이 바로 내 옆자리에 앉는 것이 아닌가.내 추측으로는 한국 쪽 명단을 보고 그가 자리를 선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인데 아무튼 시일도 지나고, 상황도 변하고, 내 생각에도 변화가 생겼기에 나는 박 대통령 문제엔 함구하고 엉뚱하게 월남전에 관한 이야기를 화두로 삼았다. 그는 월남전에 관해 쓴 훌륭한 책 두 권을 종이에 써주며 추천하였다. 홀브룩은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훌륭한 조정역을 했으며 유엔대사도 지낸 출중한 외교관이다. 아깝게도 요절하였다. 뛰어난 외교관이고, 언론 칼럼니스트이며 <포린 폴리시>의 편집책임자였던 그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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